(105) 맥아더의 오판과 중공군 참전

김일성·스탈린, 모택동 참전 요청
모, 지원군사령관 팽덕회 지명
모, 스탈린 공군 지원 불가에도
김의 동북 망명정부 때문에 참전
모, 소련 극동군 파병 극도 경계
중공군 인해전술로 평양 탈환
장진호 전투, 흥남철수 가능케 해

류석춘
류석춘

국군이 북진하며 38선을 넘자 초조해진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서명한 편지를 모택동에게 보내 참전을 요청했다. 이 편지의 실물은 현재 중국 요녕성 단동에 있는 ‘항미원조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편지는 ‘존경하는 모택동 동지 앞’으로 시작하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김일성·박헌영’ 두 사람의 이름과 서명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마지막은 편지를 쓴 날짜 ‘1950년 10월 1일’ 그리고 편지를 쓴 장소 ‘평양시’를 밝히고 있다.

이들의 참전 요청이 얼마나 구구절절 했는지 보여주기 위해 편지의 마지막 문단 전체를 여기 옮긴다. 급하게 쓴 까닭인지 편지는 중언부언에 오자(誤字)까지 많다. [ ] 속에 바로잡는 표현을 넣었다 (김필재, 2011 7 27, "포복절도! 김일성 편지…얼마나 급했으면" 뉴데일리).

"적들이 금일 우리가 처하여 있는 엄중하고 위급한 형편을 리용하여 우리에게 시간 여유를 주지 않고 계속 진공하여 38도선을 침공하게 되을[될] 때에는, 우리의 자체의 힘으로 새는[서는] 이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의 특별한 원조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즉 적군이 38도선을 침공하게 될 때에는 약속한 바와 갓치[같이] 중국 인민군의 직접 출동이 절대로 필요하게 됩니다. 이상과 같이 우리의 의견을 당신에게 제이[제의]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당신의 회답을 우리는 기다림[립]니다."

중국 단동 ‘항미원조기념관’에 전시된 김일성의 친필(親筆) 편지 마지막 부분으로, 박헌영과 함께 서명해 모택동에게 보낸 출병 요청 서한의 일부다. 편지의 마지막에 있는 날짜 다음 줄 ‘평야’는 ‘평양’의 오자(誤字)다. 이 서한에는 이것 말고도 오자가 많다.
중국 단동의 ‘끊어진 압록강 다리’ 위에 설치된 대형 석조 달력. 1950년 10월 19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관)’ 팽덕회가 압록강 대교를 건너 북한으로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출처: 동아일보 2023 7 12)
중국 단동의 ‘끊어진 압록강 다리’ 위에 설치된 대형 석조 달력. 1950년 10월 19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관)’ 팽덕회가 압록강 대교를 건너 북한으로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출처: 동아일보 2023 7 12)

박헌영이 들고 온 편지를 받은 10월 1일 모택동은 중국의 참전을 요구하는 스탈린의 전문도 동시에 받았다. 참전에 적극적이었던 모택동은 다음 날 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다수의 반대로 ‘당분간 참전할 수 없다’는 전문을 모스크바에 보내야만 했다. 소련은 거듭 참전을 독려했다. 모택동은 참전에 적극적 입장을 가진 팽덕회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으로 지명하고, 10월 8일 참전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구자룡, 2023, 『끝나지 않은 전쟁 6·25』 화정평화재단: 160-163).

그러나 10일 소련은 느닷없이 ‘소련 공군이 준비되지 않아, 중소 모두 조선에 당분간 출병하지 않는다. 김일성은 압록강 이북으로 철수토록 한다. 소련 공군 지원은 2개월 후에나 가능하다’는 요지의 전보를 보냈다. 분노한 모택동은 12일 파병 준비 명령을 취소하고 소련에 파병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하루 만인 13일 다시 파병으로 돌아섰다. ‘김일성이 동북에 망명정부를 세우기 전에 참전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구자룡, 위 책: 164-165).

"북한이 중국 동북 지방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으면 전쟁은 동북 지방까지 확대된다. 그럴 경우, 스탈린은 중소동맹조약에 따라 중공군의 작전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수십만의 소련 극동군을 동북에 파병할 근거를 갖게 된다…2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 소련은 일본과의 전투를 구실로 동북에 출병했다. 이어 장개석에게 중국 주권을 훼손하는 굴욕적인 조약을 강요했다.

6·25전쟁이 중국 국내로 확대돼 소련이 출병하면 전쟁의 승패에 상관없이 장개석 정부 때처럼 소련군이 주둔하게 된다. 이럴 경우, 동북의 주권을 침해받을 수 있다는 게 모택동의 고민이었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전쟁이 중국 국내로 확대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렇다고 ‘북한 동북 망명정부’가 들어섰는데 소련의 동북 출병을 거부하면 중소동맹조약도 난파될 우려가 있다. 모택동의 신중국 건설에 필요한 군사 외교 경제적 지원이 어려워진다. 전쟁으로 미국과 적대적 관계가 된 상황에서 소련까지 돌아서면 공산당 정권도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구자룡, 위 책: 165-168).

모택동이 내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항공 지원 약속도 없이 파병을 결정한 속 사정이다. 10월 18일 모택동은 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파병 명령을 전달했다. 모택동은 ‘미국을 이기지 못해도 우리는 싸워야 한다’며 장남 모안영(毛岸英)도 파병했다.

중공이 참전 결정을 마무리할 즈음인 10월 15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하와이 서쪽 태평양에 있는 웨이크섬까지 날아와 맥아더를 만났다. 현지 최고 책임자의 중공군 참전 여부에 관한 판단을 듣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서 맥아더는 중공군 참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맥아더는 이어서 ‘미군은 크리스마스 때까지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도 했다. 맥아더의 엄청난 오판이었다.

중공군의 출병 날짜는 10월 19일이었다. 중국의 항미원조지원군 4개 군(軍)과 3개 포병사단 25만여 명이 이날 안동(安東, 단둥), 장순하구(長旬河口, 창덴허커우), 집안(集安, 지안) 3곳의 다리를 넘었다. 일부 병력은 다리가 없는 영하의 압록강을 몰래 건너기도 했다. 이들은 낮에는 동굴, 터널, 갱도, 초가집 등에 숨어있다가 어두워지면 이동했다. 1차 25만에 이어 2차 15만 그리고 3차 20만, 합계 60만 명이 참전 초반 북한으로 넘어왔다.

위: ‘초산 과속’ 역풍으로 전선에 구멍이 생겨 원산이 중공군에 손쉽게 넘어갔다.아래: 원산 함락 후 장진호 전투를 통해 흥남 철수작전이 성공하는 과정.(출처: 구자룡,
위: ‘초산 과속’ 역풍으로 전선에 구멍이 생겨 원산이 중공군에 손쉽게 넘어갔다.아래: 원산 함락 후 장진호 전투를 통해 흥남 철수작전이 성공하는 과정.(출처: 구자룡, "혹한과 인해전술 이긴 장진호 철수작전 (상)" 동아일보 2023년 7월 20일).

첫 전투는 10월 25일부터 11월 4일까지 평안북도 동쪽 끝 ‘운산’에서 벌어졌다. 중공군의 존재를 전혀 모르던 국군 1사단 15연대 그리고 미군 제1기병사단 8기병 연대가 박살이 났다. 생포한 포로가 인근에 2만 명가량의 중공군이 있다고 털어놓자 백선엽 사단장은 미 8군을 통해 맥아더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동경 사령부는 조선족 의용군 참전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중공군은 운산 전투 후 감쪽같이 사라졌다.

압록강에 10월 26일 도달한 국군 2군단 6사단 역시 초산에서 매복 포위당해 괴멸했다. 2군단의 7사단과 8사단 역시 하룻밤 사이에 무너졌다. 국군 2군단이 무너진 곳에 미 2사단이 급거 투입됐다. 그러나 미 2사단 역시 청천강 변의 평안남도 개천군 ‘군우리’ 좁은 계곡에서 중공군에 걸려들었다. 11월 29일부터 12월 1일까지 사흘 만에 사단 병력의 20%만이 생존했다.

12월 4일 중공군은 평양을 탈환했다. 중공군의 공세로 미군은 12월 16일 38선 남쪽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중공군이 38선을 넘은 날짜는 열흘 뒤인 12월 26일이다. 중공군 내부에서 남진의 속도와 범위를 두고 이견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바로 서울까지 가야 한다고 보았지만, 팽덕회는 서울 점령을 북한군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급선이 길어지면 미군의 유인작전에 걸려들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 10월 26일 원산에 상륙한 미 10군단은 동해안을 따라 청진으로 북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산의 국군 2군단이 궤멸하자 동해안에서 작전 중이던 미군과 서해안에서 작전 중이던 미군 사이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두 지역의 작전 지휘권을 분리한 맥아더의 판단 또한 상황을 악화시켰다. 두 전선의 빈틈을 타고 중공군이 유유히 남진해 11월 9일 원산을 점령했다. 함경북도까지 진출한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의 퇴로가 끊겼다.

이들을 안전하게 후퇴시키기 위한 전투가 개마고원의 인공호수 장진호 주변에서 벌어졌다. 살인적인 추위로 참호조차 팔 수 없었던 미군은 전우의 시체를 쌓아 방벽으로 삼으며 전투를 수행했다. 동상으로 인한 피해도 엄청났다. 밤이면 피리를 불고 꽹과리를 치며 끝도 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아군은 전멸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장진호 전투의 성공으로 미군은 물론 국군 그리고 피란민까지 흥남 부두에서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다. 1950년 12월 24일 마지막으로 철수하는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는 약 1만 4000명의 민간인이 타고 있었다. 영화 ‘국제시장’을 통해 전 국민이 알게 된 감동적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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