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이승만이 4·19로 하야하는 과정에는 1956년 김창룡의 죽음이 가져온 정치 지형의 변화가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당시 대한민국을 움직이던 정치는 크게 세 영역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첫째는 6·25로 비대해진 군, 둘째는 여당인 자유당, 그리고 셋째는 대통령 비서실인 경무대 간의 역학이다. 이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깅창룡 죽음 이전까지 군은 비록 삐걱거리긴 했지만 ‘정일권·백선엽·이형근’ 세 육군 대장이 이끄는 파벌 사이의 견제와 균형 그리고 특무부대장 김창룡과 헌병총사령관 원용덕의 견제와 균형이 동
1956년 1월 40세의 나이에 흉탄으로 숨진 특무대장 김창룡 소장의 죽음은 잘나가던 이승만 정권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는 서막이었다. 개인적 원한과 비리 그리고 권력 내부의 갈등이 얽히고설켜 빚어진 사건은 80대로 접어든 고령의 대통령 이승만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구사하던 분할지배 (divide and rule) 전략에 엄청난 구멍을 냈다.이때부터 권력의 누수를 겪으며 이승만 정권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김창룡은 이승만 정권에서 도대체 어떤 역할을 했길래 그의 죽음이 그렇게나 엄청난 후폭풍을 초래하게 되었는가? 그의 경력
1956년 1월 30일 출근길의 김창룡 소장을 저격한 범인은 육군 소령 그리고 중위 계급장을 각각 단 군복을 입은 송용고와 신초식이었다. 이들이 쏜 6발의 총탄으로 김창룡은 서대문 적십자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결국 숨졌다. 연락을 받은 김창룡의 부관 엄재림이 달려와 시신을 통의동 특무부대로 옮기고, 지금 4·19혁명기념도서관 자리에 있는 국회의장 이기붕 자택을 경유해 경무대의 이승만 대통령에게 피격 사실을 보고했다 (이대인, 2011, 『대한민국 특무부대장 김창룡』 기파랑: 265).이승만은 ‘나라가 망했군, 나라가 망했어’라고 탄식
잘 나가던 이승만 대통령의 앞날에 먹구름이 끼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통령에게 ‘국방부 원면(原綿) 부정’과 ‘군 고위층 축첩(蓄妾)’에 관한 내사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1956년 1월 30일 아침 지프차로 원효로 집을 나서던 특무대장 김창룡 소장이 총격으로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이승만 대통령의 통치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그로부터 시작된 통치의 누수와 균열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한다.우선 정치 타임라인에서 1956년 1월 30일이라는 시점이 갖는 의미와 맥락을 거시적으로 검토해 보자. 이승만은 부산 임시수도에서 19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7월 26일부터 8월 13일까지 미국을 국빈 방문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초청으로 7월 25일 출국한 이승만은 26일 워싱턴 DC에 도착해, 8월 1일 필라델피아, 2일 뉴욕, 5일 로스앤젤레스, 7일 샌프란시스코, 8일 하와이를 방문한 후 11일 귀국하는 비행기를 탔다. 서울에 돌아온 날이 13일이었으니 대략 20일에 걸친 대장정이었다.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성사되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을 달래고 또 달래야 했다. 역발상에 능한 이승만은 6·25 전쟁 발발과 함께 통일의
식민 통치를 거치면서 번창한 왜색불교를 전통불교로 되돌리고자 이승만 대통령은 이른바 ‘불교 정화’를 위한 유시(諭示, 타일러 가르침)를 1954년 5월 21일 처음 발표했다. "사찰을 보존하자, 김 대사(大師)를 찬양"이라는 제목의 담화를 시작으로 (공보처, 1956, 『대통령이승만박사담화집』 제2집) 이승만은 1955년 12월 8일까지 대략 1년 반 동안의 기간에 총 7번 ‘불교 정화’에 관한 유시를 이어갔다 (이재헌, 2014,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와 불교정화 운동의 전개" 『대각사상』 22집: 279-333).이승만의 1차
전쟁 중인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을 공표했다. 대한민국과 주변 국가 간의 수역을 구분해 해양 자원을 배타적으로 관리하고 주권이 미치는 ‘영해’의 경계를 선포한 통치행위였다. 이승만은 일본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경계선이란 의미에서 ‘평화선’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일본을 포함한 외국에서는 이승만의 일방적 선포였기 때문에 ‘이승만 라인’ (Rhee Line) 이라 부르기도 한다.평화선의 경계를 살펴보자. 대한민국 정부가 1952년 1월 18일 ‘관보’에 게재한 평화
1952년 7월 4일 국회를 통과한 개헌은 정부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과 야당의 ‘내각제 개헌안’이 대립하는 가운데 정치 역학이 만들어 낸 현실에 따라 두 개헌안을 발췌해 꿰맞춘 개헌이었다. 출석의원 166명 중 3명이 기권하고 163명이 찬성했다. 7월 7일 공포된 개정 헌법은 이승만이 주장하던 대통령 직선제에 야당이 주장하던 내각제의 국무위원 불신임제도가 보완된 모습이었다.이승만은 국회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의원 수가 절대적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언설과 시위 그리고 합법적 통치행위를 통해서 자신이 이상으로 생각하던 대통령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5년 만에 그리고 남과 북에 이념과 체제가 전혀 다른 새로운 국가가 들어선 지 2년 만에 시작돼 3년 동안 치열하게 전개된 전쟁은 결국 휴전으로 대체됐다. 그 결과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뀌었지만, 분단된 국토의 모습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한반도는 여전히 허리에서 두 동강 나 있었고, 북쪽은 소련과 중국 그리고 남쪽은 미국 중심의 국제사회(UN)와 맺던 관계가 더욱 긴밀해졌다.그렇다면 전쟁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는가? 전쟁의 영향을 제대로 살피기 위해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단기적 효과부터 중장기적 효과
6·25전쟁이 가져온 인명 피해는 엄청났다. 전쟁의 인명 피해는 보통 ‘사망’ ‘부상’ ‘실종/포로’ 등과 같은 범주로 구분해 집계한다. 피해 규모를 살피는 과제를 단순화시키기 위해 참전한 군인의 사망 현황을 우선 살펴보자. 2024년 6월 30일 현재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제공하는 6·25 전쟁 피해 자료에 따르면 남쪽은 국군 14만 명과 UN군 4만 명을 합해 18만 명이 사망하고, 북쪽은 북한군 52만 명과 중공군 15만 명을 합해 67만 명이 사망했다.군인 사망자가 남쪽에 비해 북쪽이 4배 정도 많은 사실은 남쪽이 전쟁에서
속칭 ‘부산정치파동’이라 불리는 사건은 1952년 5월 25일의 계엄령 선포로부터 같은 해 7월 7일 헌법개정 공포에 이르기까지 부산에서 일어난 일련의 파행적 정치과정을 지칭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권력구조를 둘러싼 개헌 문제는 물론 미국의 내정간섭이라는 문제까지 시야에 넣어야 정확한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1948년의 건국헌법에 임기가 2년으로 명시된 제헌국회를 두고 헌법을 고치자는 주장이 처음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49년 5월이었다. 임기연장 개헌에서부터 헌법을 아예 내각제로 바꾸자는 주장까지 여러 의견이 나왔지만,
이승만에 관한 연구를 하면 어이없는 일들을 많이 겪는다. 물론 어이없는 일을 저지른 사람들 대부분은 친북·좌익들이다. 대표적인 예가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으로 몰아간 일이다. 이들은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이 정읍에서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라고 처음 말했기 때문에, 분단이 시작되었고 또 고착되었다고 주장한다.그러나 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그보다 4개월 앞서 북한의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1946년 2월 이미 출범한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 못 본 채 지나친다. 이 사실을 숨겨야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이 시작될 즈음 전황은 현재의 휴전선과 대동소이한 전선이 형성되면서 고지 차지를 위한 치열한 국지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미국도 지쳐갔고 중공도 지쳐갔다. "[미국의] 유럽방위에 대한 부담, 38선 돌파 북진 시 20만 명 이상의 추가적인 미군 인명 손실 우려, 전쟁 장기화에 따른 여론의 피로감 등이 휴전으로 방향을 틀게 했다. [중공은] 1951년 4월 이후 두 차례 춘계 공세를 퍼부으면서 70만 명 이상의 대병력을 동원했음에도 중동부 전선은 점점 북으로 밀려 올라갔다" (구자룡, 2023, 『끝나지
중공군 참전으로 ‘1·4후퇴’를 하던 즈음 비극적 사건이 벌어졌다. ‘국민방위군사건’이다. 이 비극적 사건은 6·25 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을 비하하는 세력이 열거하는 목록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다. 사건의 실체와 법적 처리는 물론 이 문제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이 과연 무슨 책임을 얼마나 져야 하는지 따져 보도록 한다.다행히 이 사건에 대해서는 자료에 대한 접근이 풍부하고 논의가 명확한 학술 논문이 존재한다. 김세중 교수가 쓴 ‘국민방위군 사건’이란 제목의 논문이다. 유영익·이채진 두 사람이 편집해 2002년 연세대 출판부가
독립기념관관장, 제14대 국회 민주당 비례 의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서울신문 주필 등을 역임한 김삼웅(金三雄)은 2012년 출판한 『독부(獨父) 이승만 평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서울을 버린 이승만은…채병덕 참모총장이 북한의 탱크가 서울에 진입하기 전에 유일한 한강 다리인 한강철교를 폭파하라고 최창식 공병감에게 지시하여, 28일 새벽 2시 30분경 국군이 한강철교를 폭파하는 바람에 다리를 건너던 4천여 명의 시민이 현장에서 폭사하거나 물에 빠져 죽고" (257쪽).김삼웅의 이 글은 얼마나 사실일까? 놀랍게도 사
‘1·4후퇴’로 상징되는 1950년 말 1951년 초 전황은 최악이었다. 맥아더는 중공군 참전에 확전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해안봉쇄, 만주 산업시설 폭격, 장개석 군대 투입, 증원군 파견’ 등을 제시했다. 한마디로 ‘제한전’ (limited war) 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이었다.맥아더의 주장을 무시하고 철수까지 검토하던 트루먼 대통령은 그러나 1950년 11월 30일 느닷없는 돌출 발언을 했다. 기자회견에서 ‘핵무기 사용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소식에 놀란 영국의 애틀리 수상은 득달같이 달려가
중공군의 6·25 전쟁 참전 가능성에 대한 맥아더의 판단이 의도적 오판이건 아니건, 중공군은 결국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너 참전했다. 중공군 참전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던 전투 현장의 국군과 UN군은 야간에만 움직이며 쏟아져 들어온 60만 명의 유령과 같은 적에게 곳곳에서 당했다. 중공군은 특히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사이 맥아더가 작전 지휘권을 분리한 공간을 파고들었다. 개마고원 서쪽 끝 산악지대였다.산악전에 능한 중공군은 별 저항도 없이 빈 공간을 남진해 10월 10일 국군이 탈환했던 원산을 11월 9일 다시 점령했다
지난 회(104) 설명한 중공군 참전에 대한 맥아더의 오판이 ‘의도된 것’이었다는 대안적 해석이 존재한다 (조갑제, "맥아더가 중공군 개입 가능성 무시하고 북진한 이유 밝혀지다" 월간조선 2015년 7월호).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료를 근거로 한다.첫째, 6.25 당시 참모총장이던 『정일권 회고록』 (1996, 고려서적), 둘째, 미국 역사학자 매튜 에이드 (Matthew Aid) 의 책, The Secret Sentry: The Untold History of the National Security Agency (20
국군이 북진하며 38선을 넘자 초조해진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서명한 편지를 모택동에게 보내 참전을 요청했다. 이 편지의 실물은 현재 중국 요녕성 단동에 있는 ‘항미원조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편지는 ‘존경하는 모택동 동지 앞’으로 시작하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김일성·박헌영’ 두 사람의 이름과 서명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마지막은 편지를 쓴 날짜 ‘1950년 10월 1일’ 그리고 편지를 쓴 장소 ‘평양시’를 밝히고 있다.이들의 참전 요청이 얼마나 구구절절 했는지 보여주기 위해 편지의 마지막 문단 전체를 여기 옮긴다. 급하게 쓴
1950년 8월 북한군 남진을 막은 다부동 전투는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역전극이 펼쳐지는 발판이 됐다. 일본을 상대로 수많은 ‘아일랜드 호핑’(섬 건너뛰기) 상륙작전으로 필리핀을 되찾은 경력이 있는 동경의 맥아더는 6월 29일 수원으로 날아와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며 일거에 전세를 뒤집을 상륙작전 구상에 돌입했다. 군산과 인천 등 여러 가능성을 저울질하던 맥아더는 작전 수립을 위한 동경의 8월 23일 전략회의에서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천을 고집했다. 맥아더는 “북한도 인천상륙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오히려 기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