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부산정치파동

이승만, 국회에서 직선제 개헌 시도
국회, 내각제 개헌 시도로 이(李)와 충돌
이승만 지지 장외집회, 국회 공격
미 대사, 국회 보호 핑계로 내정간섭
내각제 서민호 의원, 현역 대위 총격
이승만, 계엄령 선포하고 의원 연행
이승만 암살시도, 발췌개헌안 통과시켜

류석춘
류석춘

속칭 ‘부산정치파동’이라 불리는 사건은 1952년 5월 25일의 계엄령 선포로부터 같은 해 7월 7일 헌법개정 공포에 이르기까지 부산에서 일어난 일련의 파행적 정치과정을 지칭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권력구조를 둘러싼 개헌 문제는 물론 미국의 내정간섭이라는 문제까지 시야에 넣어야 정확한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

1948년의 건국헌법에 임기가 2년으로 명시된 제헌국회를 두고 헌법을 고치자는 주장이 처음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49년 5월이었다. 임기연장 개헌에서부터 헌법을 아예 내각제로 바꾸자는 주장까지 여러 의견이 나왔지만, 반민법 그리고 국회프락치 사건 등으로 이 문제는 국회에서 탄력을 받지 못했다.

1950년 1월 28일 민국당이 낸 ‘내각제 개헌안’이 3월 15일 국회에서 압도적 표 차로 부결되면서 시행 여부가 오락가락하던 2대 국회의원 총선은 결국 6·25 발발 직전인 1950년 5월 30일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이 선거 결과는 무소속의 국회 대거 진출이었다. 이승만은 물론 야당인 민국당도 소수파로 전락하고 말았다.

2대 국회가 전란을 거쳐 본격적 활동을 개시한 것은 1951년 초 부산이었다. 대통령 직선과 국회 양원제를 주장한 이승만의 선공이 새 국회의 개헌 논의를 열었다. 그러나 국민방위군사건 그리고 거창양민학살사건 때문에 개헌 문제는 역시 이번에도 본격적 의제가 되지 못했다.

두 사건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1951년 11월 27일 이승만은 국무회의를 거쳐 발의한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로 넘겼다. 그러나 국회는 1952년 1월 18일 이 개헌안 역시 압도적 표 차로 부결시켰다. 이 결과가 나오는 과정을 거치며 이승만은 그동안 주장하던 ‘정당무용론’을 포기하고 직접 자신의 정당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물론 다가올 대통령 선거 전략과도 무관치 않은 일이었다. 특이하게도 이승만의 정당은 두 갈래로 추진되었다. 1951년 12월 23일 두어 시간 차이로 탄생한 ‘원내 자유당’ 그리고 ‘원외 자유당’이 그것이다. 두 정당의 등장을 물밑에서 관리하던 이승만은 애초 어느 쪽도 편들지 않았다.

그러나 원내 자유당이 헌법개정 논의에서 내각제를 지향하고 있음을 확인한 이승만은 결국 ‘원외 자유당’ 손을 들어 주었다. 이범석이 주도한 원외 자유당은 ‘통일없는 휴전 반대, 대통령 직선제, 지방자치 조속 실현’ 등을 외치며 이승만을 엄호했다. 국회의 직선제 개헌안 부결은 ‘원내 자유당’을 분열시켰고, 국회를 성토하는 광범한 군중집회가 ‘원외 자유당’ 중심으로 전개되도록 만들었다.

1952년 5월 26일 국회의원 통근버스를 통째로 연행하는 헌병. 부산정치파동을 상징하는 사진이다.

일본에 있던 대한청년단 부단장 문봉제가 귀국해 ‘민의를 배반한 국회의원을 소환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장외집회를 주도했다. 이승만은 "민주 국가의 주인되는 투표자들이 [의원을] 소환한다는 것은 이론으로나 법리적으로 누가 막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며 군중집회를 부추겼다 (1952년 2월 16일).

이 상황에서 미국 대사 무초는 시위 주동 세력을 ‘폭력단’이라 판단하는 보고서를 본국 정부에 보내는 동시에 만약 내각제가 실현된다면 ‘한국은 갈수록 태산’이 될 것이란 우려도 감추지 않았다. 장외집회의 과격한 국회 공격에 자극받은 무초는 한국 정치에 대한 간섭을 본격화하며 "우리는 국회를 강화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것"이라 보고하기도 했다 (조영중, 2004, 『대통령의 무혈혁명: 1952년 여름 부산』 나남: 147-148).

미국을 등에 업은 국회는 정부의 직선제 개헌안을 부결시킨 지 3개월 만인 1952년 4월 17일 무소속 곽상훈을 대표로 123명이 서명한 내각제 개헌안을 발의했다. 전체 의석 3분의 2를 1석 넘긴 절대다수였다. 이에 대한 이승만의 방어 혹은 역공이 바로 좁은 의미의 ‘부산정치파동’이다.

국회가 내각제 개헌에 몰두하던 시기 정부는 1949년의 지방자치법에 따라 1952년 4월 25일 시·읍·면의원 그리고 5월 10일 도의원 선출을 위한 선거 일정을 확정했다. 이 선거를 시찰하는 명분으로 휴회한 국회는 의원 각자가 자신이 후원하는 지방의원 입후보자를 지원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때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1952년 4월 24일 순천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 무소속의 서민호 의원이 지방 유지들과 저녁 식사 중 현역 육군 대위 서창선을 권총으로 쏘아 즉사시켰기 때문이다. 서민호는 다음 날 구속되었고, 5월 10일에는 살인죄로 기소됐다. 그러나 국회는 5월 14일 ‘94 대 0’으로 서민호 석방을 결의해 버렸다. 국회를 성토하는 장외집회 봇물이 터졌다.

‘살인 국회의원을 옹호하는 국회는 물러가라’ 등의 구호가 난무했다. 국회의 내각제 세력은 운신의 폭이 좁아졌고, 국회의원 소환 운동은 폭발적 호응을 얻었다. 이 와중에 지방선거를 압승한 이승만 자유당은 1952년 5월 20일 일제히 개원한 지방의회를 국회 압박의 전위부대로 활용했다.

그 사이 유엔 총회 대표단으로 활동하던 국무총리 장면과 국회부의장 장택상이 돌아왔다. 두 사람은 당시 정국 현안에 대한 판단은 물론 캐릭터나 배경이 완전 상극이었다. 부드러운 성격의 장면은 미국의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정국 현안에 적극적 입장을 내지 않았다. 반면에 추진력을 무기로 이승만을 돕던 장택상은 귀국과 함께 ‘개헌이 먼저인지 대통령 선거가 먼저인지’ 따져야 한다며 국회의 개헌추진을 막아섰다.

장택상의 ‘개헌이의(異議) 4원칙’에 서명한 의원들이 순식간에 36명으로 늘어났다. 내각제 개헌에 서명했던 123명 가운데 36명이 돌아선 셈이다. 내각제는 물 건너가는 분위기로 반전됐다. 이를 보던 이승만은 4월 22일 장택상을 총리로 임명했다. 장택상은 취임과 함께 5월 14일 국회의 내각제 개헌안에 대항하는 정부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발의했다.

1952년 6·25 기념식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타원 속 유시태가 권총을 들고 저격하는 장면이다.
1952년 6·25 기념식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타원 속 유시태가 권총을 들고 저격하는 장면이다.

겉으로는 마주 오는 두 열차가 충돌하는 모습이었지만, 장택상의 총리 취임과 함께 이미 내각제 개헌은 한풀 꺾인 상태였다. 동시에 장외의 이승만 지지는 더한층 강화됐다. 이 상황을 배경으로 이승만은 1952년 5월 25일 0시 경남과 전남북 23개 시·군에 비상계엄령이 선포했다.

공산잔비 출현이 빈번하기 때문이라는 계엄사령관 원용덕의 설명이 뒤따랐다. 25일 밤부터 서민호 등 내각제 추진 의원 체포가 있었고, 26일 아침에는 국회에 등원하던 의원 47명이 탄 통근버스를 헌병대가 통째로 연행했다. 국제공산당 사건으로 지명수배를 받은 이들을 수사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칭병하며 잠수를 타던 부통령 김성수가 29일 대통령을 비난하며 사표를 던졌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계엄령과 함께 내무장관으로 발탁한 이범석을 통해 5월 30일과 6월 9일 두 차례 이들이 ‘정부혁신전국지도위원회’를 구성하고, 장면을 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비서실장인 선우종원을 통해 10억 원의 비밀자금을 뿌리며 국회의원들을 매수했다고 발표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국제연합 한국위원단은 물론 무초가 자리를 비운 사이 대리대사 역할을 하던 라이트너가 이승만의 국회 탄압을 비난하며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는 압력을 행사했다. 이승만은 국내정치 개입이라며 반발했다. 미국 대사관은 유엔군에 의한 계엄선포라는 강경책을 주장했지만, 오히려 동경의 유엔군 사령부는 외교적 압력에 만족하는 온건책을 선호했다.

결국 국방장관 로베트가 나서서 공개적 군사개입을 자제하는 정치적 해법을 촉구했고, 국무장관 애치슨 역시 한국에 안정적 정권을 확보하는 선택이 최선이라며 거들었다. 장택상이 발 빠르게 준비한 절충안 즉 양쪽의 개헌안을 발췌해 꿰맞춘 개헌안이 추진되면서 정국은 급속히 안정을 되찾았다.

6·25 발발 2주년 기념식장의 이승만 암살 시도가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의열단 출신 민국당 의원 김시현이 유시태를 사주해 발생한 사건이란 사실이 드러나면서 대통령 직선제를 중심으로 한 발췌개헌안은 7월 4일 국회를 일사천리로 통과했다. 이승만의 완승이었다. 계엄령 하 국회의원을 연행한 사건은 7월 29일 공판에서 검찰이 공소를 취하하면서 싱겁게 끝났다 (조용중, 앞의 책: 207-210).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