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정치 지형의 변화

김창룡, 이기붕과 협조 관계
원용덕, 이기붕에 눈길 안 줘
박마리아, 원용덕의 전 연인
대통령, 이기붕 건강으로 대안 모색
원면사건, 김창룡·이기붕 결별 계기
프란체스카, 박마리아 매우 예뻐해
경무대, 인의 장막으로 직언 사라져

류석춘
류석춘

1960년 이승만이 4·19로 하야하는 과정에는 1956년 김창룡의 죽음이 가져온 정치 지형의 변화가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당시 대한민국을 움직이던 정치는 크게 세 영역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첫째는 6·25로 비대해진 군, 둘째는 여당인 자유당, 그리고 셋째는 대통령 비서실인 경무대 간의 역학이다. 이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깅창룡 죽음 이전까지 군은 비록 삐걱거리긴 했지만 ‘정일권·백선엽·이형근’ 세 육군 대장이 이끄는 파벌 사이의 견제와 균형 그리고 특무부대장 김창룡과 헌병총사령관 원용덕의 견제와 균형이 동시에 작동하며 굴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김창룡 암살의 후폭풍은 결국 정일권과 이형근을 1957년 5월 군에서 퇴역시키며 파벌을 없앴지만, 군이 이승만의 후계자로 부상하던 이기붕의 자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이 대통령은 자신의 안전한 집권을 위해 김창룡의 특무부대와 원용덕의 헌병사령부로 쌍두마차를 만들었고, 그 쌍두마차는 어떤 장애물도 없이 거침없이 달려 나갔다. 그렇다면 [1952년 5월] 부산 정치파동 이후 대통령의 후계자로 등장한 이기붕은 과연 쌍두마차의 어느 고삐를 잡고 있었을까?

원용덕 국방부 장관 특별보좌관 (1952년 2월 29일부터 3월 29일까지).
원용덕 국방부 장관 특별보좌관 (1952년 2월 29일부터 3월 29일까지).

김창룡은 이기붕의 득세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고 또 오랫동안 이기붕과 밀착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반면 원용덕은 이 대통령을 향해 엎드렸을 뿐이고 아래 자리에 있는 이기붕에게는 단 한 번도 고개를 돌린 일이 없었다. 이기붕이 득세한 이후부터 대부분의 군 장성들이 그의 부름에 응했고 또 열심히 찾아다녔으나 원용덕만은 단 한 번도 이기붕을 찾아간 일이 없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가 4·19 때까지 권좌에 계속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는 미국에서 이기붕을 만나기 전에 의학도(세브란스 의전)였던 원용덕을 만났었고, 원용덕이 의전을 나와 만군(滿軍)에 입대하자 그를 따라 만주에까지 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기붕은 그러한 박마리아의 과거를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해방 후 한국에 돌아와서야 아내의 과거를 알게 되었다.

이기붕은 김창룡이나 혹은 주변에서 원용덕을 못마땅히 말할 때면 오히려 그를 감싸주는 처지에 서곤 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인격을 지키자는 생각에서였던 것이라 한다. 김창룡도 그러한 사실들을 알게 된 다음부터는 이기붕을 찾아가 원용덕에 관해 말하지 않았고, 그때부터는 오직 이 대통령에게만 헌병총사령관의 잘못을 보고했다고 한다. 한데 1956년 1월 26일, 세칭 국방부 ‘원면 사건’이 터지면서 이기붕과 김창룡 사이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김교식, 1984, "김창룡 사건의 배후는 이렇다" 『마당』 10월호: 203).

1957년 5월 27일 경무대에 모인 이승만·이기붕 가족. 왼쪽부터 이기붕 민의원 의장 장남 이강석, 프란체스카 여사, 이승만 대통령, 이기붕 의장, 이 의장 아내 박마리아, 이 의장의 차남 이강욱. 이강석은 이 대통령 82회 생일(1957년 3월 26일)에 양자로 입적됐다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원면 사건’은 미국이 원조한 장병들의 월동용 군복에 사용할 원면(솜)을 국방부가 시중에 내다 팔고 값싼 인도산을 사들이며 생긴 시세차익을 자유당에 정치자금으로 건넸다는 야당 및 자유당 비주류의 주장과,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시세차익을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차익의 용도는 예산 지원이 없던 수 많은 국방부 문관들 인건비였다는 국방부의 해명을 엄호하는 자유당 주류의 주장이 국회에서 부딪히며 세간에 알려진 사건이다.

"김창룡은 이 사건을 인지하면서 이 기회에 국방장관(손원일)과 참모총장(정일권)을 밀어낼 심산이었다. 김창룡은 옛 부하인 도진희가 국회의원이 된 것을 기화로, 도진희를 불러 국회가 원면 사건을 크게 떠들도록 지시(?)했다…문제는 이러한 사실들이 당시 ‘서대문 경무대’라 불리는 제2인자 이기붕에게 낱낱이 보고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김 장군, 원면 사건의 내용은 김 장군도 잘 알지 않소? 야당이 저렇게 떠들어대면 우리 자유당 정부가 장병들의 솜옷까지 빼앗아 먹는 줄 그렇게 오해하게 될 거요. 어른(이 대통령)께서도 국회가 저렇게 떠드는 것을 원치 않으세요. 김 장군이 어떻게 하든 이 문제가 더 이상 시끄럽게 되지 않도록 잘 좀 마무리해 주시오.’…김창룡은 이기붕의 간곡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원면 사건을 계속 들추었고 국회가 원면 사건을 더욱 크게 떠들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1956년 5월]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붕, 이렇게 가고 있었지만, 당시 이 대통령은 이기붕의 건강 때문에 다른 사람을 물색하고 있었어요. 김 장군이 경무대에 호출되어 갔는데 이 대통령께서 이기붕이는 민의원 의장 자리도 과분한 사람이니 부통령에 누가 좋겠느냐고 물어보시더래요.’…

김창룡은 이때부터 이기붕은 이미 끝난 사람이라고 보고 배를 갈아탈 준비를 서둘렀고 이런 때 이기붕의 당부쯤은 귀 밖으로 흘려버릴 수가 있었다…이 무렵 이기붕, 박마리아 쪽에서도 김창룡의 퇴진을 고려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던가 싶다. 김창룡은…원면사건 수사를 진두지휘했고, 밤늦도록 이 대통령에 보고할 자료를 정리한 다음 집으로 돌아갔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저격을 당했던 것이다." (김교식: 1984: 204-206).

군과 자유당의 관계가 이와 같은 변화를 겪는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경무대 내부의 동학이 있었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가장 큰 관심사는 남편의 건강이었다…프란체스카 여사는 누군가 대통령에게 직언을 해 남편의 기분이 상하거나 심사가 불편해지면 가만있지 않았다. 대통령에게 누가, 왜,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따져 묻고 급기야 남편의 건강에 해를 끼친 당사자를 매장시켰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프란체스카 여사가 인사와 국정에 깊이 관여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프란체스카 여사의 마음에 꼭 드는 여성이 있었다. 이기붕 씨의 아내 박마리아 씨였다. 박씨는 미국 유학을 통해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이기붕 씨는 정식으로 대통령 비서실장이 됐고, 박씨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개인비서가 됐다…

박씨는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영부인에게 세상 소식을 전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대통령의 정치 구상이나 생각은 프란체스카 여사를 통해 박씨에게 전달됐고, 반대로 박씨의 ‘뜻’은 영부인을 통해 대통령에게 즉각 전달됐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박마리아를 통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 세간에 퍼졌다…두 개의 경무대가 존재한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다. 하나는 실제 대통령이 기거하는 경무대, 다른 하나는 이기붕 비서실장과 박 씨가 사는 서대문 관저였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근검절약하고 헌신적이고 남편밖에 모르는 여자였지만 남편의 건강과 일상을 과보호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인의 장막을 쳤다. 이는 이 대통령의 심사를 거슬렀을 뿐 아니라 눈과 귀를 가로막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대통령 부부의 주변에는 국정 운영 전반에 대해 직언이나 조언을 하는 사람이 사라졌고 "각하, 아무 일 없이 다 잘돼갑니다" 하는 아부성 발언이 난무했다" (김순희, 2007, "대통령 상전 영부인 열전" 신동아 8월호).

3·15 부정선거로 가는 길은 이렇게 닦이고 있었다. 경무대 동학이 군에 미친 영향은 ‘군번 1번’ 이형근 대장의 생생한 증언도 남아있다. "[1956년 6월 27일] 내가 육군 참모총장으로 취임한 후 절감한 것은 자유당이 군을 그들의 정치자금 출처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형근 증언" 월간 중앙. 1992년 8월호).

자유당 내부도 변화를 겪고 있었다. 1954년 5월 3대 민의원 선거에서 압승한 자유당은 같은 해 11월 이승만의 중임제한을 풀어주는 사사오입 개헌을 밀어붙이면서 새로운 흐름이 생겨났다. 이기붕이 2인자로 떠오르면서 이범석·신익희·조병옥 등과 같은 건국 초기의 인물들은 차례로 이승만을 떠났다.

그 자리를 대신해 자유당에는 일제 때 혹은 해방 후 감투를 쓴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주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희석·장경근·인태식·이익홍·최인규 등과 같은 엘리트 관료파들은 이기붕을 등에 업고 과거 건국 과정에서 조직 생활을 오래 해온 사회단체 출신의 ‘무식한’ 원외 간부들을 거세해 나가고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 유능하다는 자만에 차 있었다. 자유당 정권이 패망하는 날까지 이들은 천하를 주름잡고 호령했다 (박용만, 1965, 『제1공하국 비화』 내외신서: 264-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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