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기
홍승기

10년 전쯤 국정교과서 쟁점으로 시끄러울 때, 문화체육관광부 여론과장의 전화를 받았다. 정부의 국정교과서안(案)에 대해 짧게 의견을 달라는 주문이었다.

‘북녘에 추파를 보내는 일부 역사학자들의 행태가 불쾌하지만, 정부쪽 준비가 많이 부족해 보인다, 이런 식으로 순진하게 대처하면 자칫 정권이 무너질 빌미가 되지 않을까 불안하다’ 정도로 써서 보냈다. 여론과장이 다시 전화를 했다. "뉴 라이트의 이 아무개 교수도 똑같은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 무렵 교수회에서 단체 메일이 왔다. ‘국정교과서 반대 성명을 냈다’며 ‘성명서’를 첨부했다. 성격 급한 로스쿨 초임 교수가 답 메일을 달았다. ‘언제 의견을 모았다고 이런 성명서를 발표하는가?’ 운전 중에 핸드폰을 확인하고 자칫 로스쿨의 젊은 동료가 위험하겠다 싶었다. 얼른 학교로 차를 몰아 컴퓨터 앞에 앉았다. "군대가 병력을 동원한 위기상황도 아닌데 아무런 절차도 없이 ‘교수회’ 뒤에 숨다니, 의견을 밝히려면 이름을 걸고 연명으로 하라." 이어서 유치하거나 진중한 댓글이 여러 날 꼬리를 물었고, 대놓고 훈계하려 드는 동료도 없지 않았다.

열기가 살짝 가라앉은 날, 사람 좋은 선배 교수가 문을 두드렸다. "다음 행보는 어떻게 되나?" 교수회 청탁을 받고 방문했다는 뜻이었다. "제대로 펀치가 들어오면 세게 맞받아치렸더니 잔챙이 잽만 들어오네요. 자중자애하기로 했습니다." 선배는 씩 웃고 나갔다.

의대 증원 논란에서 국정교과서 사태가 떠올랐다. 난데없이 2000명을 부르짖고, 타협은 없다고 겁박하고, 씨알도 먹히지 않을 행정명령을 남발하고, 관련 장관들이 경쟁적으로 물대포를 쏜다. 어떤 오(誤)정보 탓인지 대통령은 로스쿨이 성공했다며 의대 증원을 옹호했으나, 로스쿨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찬란한 실패의 역사를 쓰고 있다.

혹시 관점이 다르다 하더라도, 강의실만 있으면 굴러가는 로스쿨과 임상 중심 의대 교육을 비교할 수는 없다. 카데바(cadaver, 해부용 시신)가 부족하다는 비명만으로도 증명되고 남는다.

이미 늦었으나,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정책이 상식을 찾아야 한다. 로스쿨의 실패는 어물쩍 덮어지지만, 의대정책의 실패 영향은 즉각적이고 폭발적일 테다. ‘탄핵’이라는 흉기를 만지작거리며 ‘어둠의 자식들’이 분주한 바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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