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속 숨은 이야기] 피터 브뤼겔의 '바벨탑'

피터 브뤼겔의 바벨탑(1563년 /빈 미술사박물관)

◇ 성서의 창세기 형상화

바벨탑 그림을 보면 항구에 바벨탑을 건축에 소요되는 자재를 운반하는 배들이 정박해 있다. 애초부터 탑은 균형을 벗어나 기울어진 채 쌓고 있고 아래층을 완성하기 전에 위층을 쌓아 올리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결국 인간에 의해 쌓아지는 거대한 바벨탑은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탑의 기초가 기울어진 건 세상의 균형이 깨진 걸 상징한다. 토목공사 순서가 맞지 않는 것 또한 욕망으로 가득한 세상의 부조리를 보여준다. 욕망으로 쌓은 탑은 부실하고 종당엔 무너지고 만다.

바벨탑은 성서의 창세기를 형상화한 그림이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정치사회를 풍자한 그림이기도 하다. 그림 아래 부분을 확대해 보면 망토를 입은 사람과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망토를 입은 사람은 당시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2세로 추정된다. 화가 브뤼겔은 곧 무너질 바벨탑 아래에 펠리페 2세를 그려 넣어 실정으로 말미암은 왕의 몰락을 예고하고 있다. 바벨탑은 창세기 바벨탑을 상상으로 그렸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국왕 펠리페 2세에 대한 대중의 정치사회적 불만을 표현한 그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 무너질듯 위태도운 ‘도시’

브뤼겔의 그림은 바벨탑이 하나의 도시로 묘사되어 있다. 바벨탑 안에서 노동하고 말과 수레가 다니고, 아낙네들이 빨래를 널며, 바벨탑 건축에 동원된 노동자들과 기계가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기초부터 기울어진 바벨탑은 금세 무너질 듯 위태롭다.

바벨탑(부분) 위로 올라갈수록 탑이 기울어져 있어 위태로워 보인다.

창세기 바벨탑에 관한 기록은 이러하다.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사람들은 동쪽에서 오다가 시날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의논하였다. "어서 벽돌을 빚어 불에 단단히 구워내자." 이리하여 사람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 또 사람들은 의논하였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에 높은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높이고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하나님께서 이를 보시고, "사람들의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당장 땅에 내려가서 말을 뒤섞어 놓아야겠다" 하고 생각하며 사람들을 거기서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던 일을 그만두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을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 ‘유대인의 고대사’ 탓에 탑으로

성경의 기록은 이러한데 사람들은 예외 없이 바벨탑을 나선형 모양의 높은 탑이라 여긴다. 성경에 따라 바벨탑은 독립된 탑이 아니라 망대(望臺)라 번역한다. 망대는 적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높이 세운 탑이다. 또 성서에는 사람들이 도시를 세우던 일을 스스로 그만두었다고 기록했지, 폭풍이 불어와 탑이 파괴되었다고 기록하지 않았다.

바벨탑(부분) 무너져 내리는 듯 보이는 탑의 일부.

어째서 이런 오류가 생겨났을까? 그건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37~100)가 집필한 ‘유대인의 고대사’(The Antiquities of the Jews) 중 바벨탑 이야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데 있다. ‘유대인의 고대사’는 지금으로 치면 베스트셀러였다. 16세기 초 플랑드르 화가들은 그 텍스트를 토대로 바벨탑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 대표적인 화가가 바로 브뤼겔이었다. 요세푸스의 ‘유대인의 고대사’ 중 바벨탑 이야기는 점토판에 기록된 수메르 전승신화를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신화는 이렇게 전한다. "처음에 인간들은 한 민족, 한 가지 언어를 사용했다. 언젠가부터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신을 넘보게 되었다. 인간은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탑을 쌓기 시작했다. 이를 본 신은 몹시 분노했다. 탑을 쌓던 어느 날 갑자기 폭풍이 불어왔다. 탑은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고, 그때부터 인간들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진 인간은 결국 여러 민족으로 나뉘어졌다. 이 모든 게 신의 뜻이었다."

◇ 바벨탑 그림으로 세상에 경고

요세푸스의 ‘유대인의 고대사’에 영향을 받은 것 외에 브뤼겔이 바벨탑을 그린 또 하나의 이유는 당시 플랑드르 사회의 정치적 혼란이다. 당시 플랑드르의 정치사회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오랜 대립으로 극도의 혼란에 빠졌고, 거기다 과도한 세금 징수와 강압적 통치에 대중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거기다 스페인 펠리페 2세의 침공에 맞서 오랜 기간 전쟁을 벌였다. 화가 브뤼겔의 눈에 비친 세상은 멸망 직전의 바빌로니아와 다름없었고, 이에 브뤼겔은 바벨탑 그림으로 세상에 경고하고 싶었을 터이다.

바벨탑(부분) 펠리페 2세로 추정되는 인물과 그 앞에 무릎꿇은 무리.

브뤼겔의 상상력에 단초를 제공한 저술가 요세푸스의 격랑 같은 삶이 흥미롭다. 그는 유대 바리새파 제사장 가문의 후손이었는데, 서기 37년에 태어나 100년경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로마제국에 항거한 유대교 민족주의자들이 예루살렘에 망명정부를 세우자 그는 유대군대에 자원입대하여 지휘관이 된다. 그는 정예 로마군 토벌대의 공격을 무려 6주 동안이나 버티다가 결국 투항한 뒤 로마군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의 부하가 된다.

베스파시아누스가 훗날 로마 황제가 되자, 요세푸스는 황제로부터 시민권과 연금, 토지를 하사받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유대인의 고대사’를 집필한다. 황제의 아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성의 함락을 목도한다. 이때 요세푸스는 예루살렘 성벽을 돌며 결사항전 중인 유대인 병사들을 향해 항복하여 목숨을 버리지 말라고 외친다.

이 일을 두고 후대 역사가들 중 일부는 예루살렘성이 함락될 게 확실한 만큼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평가했지만, 어쨌거나 요세푸스는 오늘날까지 유대인의 공적이며 변절자의 대명사로 낙인찍혀 있다.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1525~1569)
브뤼겔이 연필로 그린 자화상.
브뤼겔이 연필로 그린 자화상.

창세기에 바벨탑은 바빌로니아 지방에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 모양은 아무도 모른다. 학자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와 비슷한 형태였을 거라고 추정했는데, 중세에 활동한 플랑드르 화가 브뤼겔의 그림으로 바벨탑의 모습이 구체화되었다. 브뤼겔은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힌트를 얻어 원통의 나선형 바벨탑을 그렸고, 사람들은 이 그림을 그대로 믿기 시작했다. 브뤼겔은 죽음에 임박하여 아내에게 자신의 작품 중 일부를 불태우라고 유언했지만 아내는 그의 유언을 따르지 않았다. 불태워 버리라는 그림 목록 중에 바벨탑이 포함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화가는 상상력으로 그린 그림을 사람들이 사실로 믿는 경향이 부담되고 염려되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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