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블루오션 유엔사] ① 6·25 전쟁과 유엔군사령부의 탄생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유엔은 즉각 안보리를 소집해 "북한군이 전쟁을 중지하고 즉각 38도선 이북으로 철군할 것"과 함께, "북한 무력공격 격퇴에 필요한 지원을 제공할 것"을 국제사회에 권고했다. 이에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이 한국을 돕기 위해 참전함에 따라 유엔안보리 결의안 제84호를 채택하고 미국 주도로 다국적통합군사령부를 창설했다. 이것이 바로 유엔군사령부(이하 유엔사)이다.

6·25전쟁 3년 동안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연인원 194만여 명의 유엔군이 참전 15만여 명이 희생했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자 16개국 참전 대표들은 워싱턴에서 "한반도에서 전쟁 재발 시 재참전할 것임"을 결의했다. 이후 지금까지 유엔사는 한국에 남아 정전협정 관리 등 본연의 임무를 수행 중이다.

그러나 정전협정을 체결한 지 71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6·25 전쟁에 대한 기억과 함께 유엔사의 존재 또한 잊혀져 가고 있다. 북한이 의도적으로 유엔사 무력화를 시도했고, 한국 정부마저 유엔사의 중요성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작금의 글로벌 정세와 북한의 핵 고도화 등 실질적 위협에 직면한 한국이 최근 들어 유엔사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있다.

따라서 본지는 앞으로 10회에 걸친 기획 시리즈를 통해 유엔사의 과거와 현재를 재조명하고, 향후 유엔사가 유용한 안보자산으로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인지를 연재한다. 필자의 오랜 학문적 연구와 현역시절 유엔사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국민의 기억과 관심에서 멀어져 있던 유엔군사령부의 존재감과 소중함을 다시금 일깨우는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필자 : 장광현 예비역 육군 소장

육사 제39기 출신으로 2009년 장군 진급 이후 육군본부, 합동참모본부, 야전군사령부, 한미연합군사령부, 유엔군사령부 등에서 중요 직위를 두루 역임했다. 특히 2015년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참모장 겸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로 근무하면서 한미동맹 강화 및 국익에 기초한 군사 외교 활동에 매진했다. 전역 이후 아주대 대학원 공학박사(NCW 전공)를 취득했으며 <다시 유엔사(UNC)를 논하다> <유엔군사령부 인사이트> 등의 책을 펴냈다.

시리즈 목차

① 6·25 전쟁과 유엔군사령부의 탄생
② 유엔군의 참전으로 다시 찾은 평화
③ 잊혀진 전쟁, 잊혀져 가는 유엔사
④ 한반도 정전협정 관리자, 유엔사의 역할
⑤ 유엔사 회원국과 호스트네이션 한국
⑥ 한반도 평화 논의와 유엔사의 기로
⑦ 유엔사 재활성화의 진실과 오해
⑧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 유엔사의 역할
⑨ 유엔사의 시련과 위기, 그리고 새로운 도약
⑩ 국제연합의 선물 유엔사를 지키자

유엔사 창설식.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즈 대장이 맥아더장군에게 유엔군사령부 기를 수여하고 있다(1950.7.24). /유엔사 페이스북
유엔사 창설식.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즈 대장이 맥아더장군에게 유엔군사령부 기를 수여하고 있다(1950.7.24). /유엔사 페이스북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지 이틀이 지난 1945년 8월 8일 소련이 느닷없이 대(對)일본 선전포고를 했다. 같은 해 7월 포츠담에서 미·영·소 3국 수뇌가 제2차 세계대전 전후(戰後) 처리 문제를 협의할 때만 해도 소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소련이 뒤늦게 선전포고와 함께 만주국을 점령하고 일본 지배 아래 있던 요동 반도와 뤼순을 거쳐 단숨에 조선으로 진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미군은 일본 본토가 아닌 오키나와에 머물고 있었기에 한 마디로 속수무책이었다. 예상보다 빠른 소련군의 진출 속도를 우려한 미국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분할 점령할 것을 긴급히 제의하자 뜻밖에도 소련은 이를 받아들였다.

1945년 8월 15일 원자폭탄 피폭으로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남과 북은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얄타회담에서 이루어진 미소 간의 비공식적인 합의에 근거하여 남과 북은 각각 미국과 소련의 군정 아래 서로 다른 체제로 갈라지고 말았다. 미국의 군정을 받는 남한은 ‘대한민국’으로 국호를 정하고, 1948년 8월 15일 제3차 유엔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받아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반면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1948년 9월 9일 소련을 비롯해 중국공산당, 그리고 동유럽 국가들까지 포함하는 유라시아 공산권 블록 내에서 하나의 국가로 인정받았다. 36년간의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지 불과 3년 만에 38도선을 기준으로 분단이 고착된 것이다.

미·소 군정이 끝나면서, 미국은 극히 소량의 소화기와 물자만 한국에 넘겨주었고, 495명의 군사고문단을 남긴 채 1949년 6월 모든 군대를 철수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소련군은 T-34 전차와 야크(Yak-3) 전투기, 어뢰정 등 중화기를 통째로 북한에 넘겼으며, 미군보다 앞선 1948년 12월에 3000명 이상의 군사고문단을 남기고 북한에서 철군했다. 소련 군사고문단은 북한군 건설과 무장력 증강, 그리고 간부 양성을 포함한 조선인민군 훈련에 힘썼으며, 후일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구체적으로 발전시키는 등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의 도움으로 철저히 공산주의적 관념에 기초해 남침계획을 완성한 김일성은 끈질긴 협상을 시도한 끝에 1950년 4월 마침내 스탈린으로부터 전쟁계획을 승인받았으며, 스탈린의 의도를 간파한 모택동에게서도 지원 약속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공산 진영의 교황’과도 같았던 스탈린은 6·25전쟁의 서막을 울리는 ‘신호자’(Starter)이자 ‘연출자’이면서 ‘감독’이었으며, 김일성과 모택동은 스탈린의 사주에 따라 행동하는 ‘전쟁수행자’로 확정된 것이다.

핵을 가진 미국과의 충돌을 원치 않았던 스탈린이 김일성의 제안을 여러 차례 거절하다가 끝내 수락한 이유는 카자흐스탄에서 실시한 소련의 핵폭탄 실험 성공(1949.8.29)으로 얻은 자신감에 더하여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의 국공내전 승리(1949.10.1), 그리고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애치슨라인’(Acheson Line) 발표(1950.1.12)로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 등 주변 환경의 변화가 유리해졌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모든 남침 준비를 끝낸 북한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기습남침을 감행했다. 암호명 ‘폭풍’에 따라 김일성 휘하의 인민군 7개 사단(1,2,3,4,5,6,12사단)과 제105땅크(전차)연대가 38도선을 연하는 군사분계선을 넘어 전 전선에 걸쳐 일제히 전면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김일성의 목표는 ‘3주 안에 남한 땅 전체를 석권하는 것’이었다. 당시 북한군의 상당수는 중국 국공내전에 참여한 전력이 있는 정예군이었다. 반면, 한국군은 무장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여서 북한군의 기습남침에 맥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6월 25일 오전 10시 30분 경무대에서 첫 전황 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 단독으로 북한의 남침을 막기엔 역부족으로 여기고 곧바로 주한미국대사 무초(Mucho)를 불러 도움을 청하는 한편, 장면 주미 한국대사를 통해 미국 대통령과 유엔에 원조를 요청했다.

미국의 대응 또한 매우 빨랐다. 무초 대사로부터 한국이 처한 상황을 보고받은 애치슨(Acheson) 미 국무장관은 즉시 트루먼(Truman)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주말 휴가차 미국 중서부 미주리 주의 작은 마을 인디펜던스에 있는 고향 집에 내려와 있던 트루먼 대통령은 6월 25일 애치슨 국무장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직후 워싱턴으로 긴급 복귀했으며, 다음날 6월 26일 아침을 기해 ‘대통령 성명서’를 발표하고 미군 참전을 결정했다. 무초 대사로부터 애치슨 장관, 트루먼 대통령에 이르는 신속한 전황 보고와 과단성 있는 조치 등 미국의 발 빠른 개입이 없었더라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한국은 더욱 중대한 고비를 맞게 되었을 것이다.

사실 미국으로서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5년이 채 되지 않은 시기인지라 한반도 지역분쟁에 군사적 개입을 할 만한 여력이 충분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애치슨라인 밖에 있던 한반도 사태에 즉각 개입한 것은 ‘소련 진출 봉쇄’와 ‘제3차 세계대전 방지’라는 전략적인 차원에서 내린 고육책이었다.

6·25전쟁 발발에 따라 개최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모습(1950. 6). /유엔사 페이스북
6·25전쟁 발발에 따라 개최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모습(1950. 6). /유엔사 페이스북

미국은 신속히 유엔(UN)을 움직였고, 미국의 요청을 받은 유엔은 6월 25일 즉각 안보리를 소집해 북한에 "전쟁 행위를 당장 중지하고 북위 38도선 이북으로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는 유엔안보리 결의안 제82호(S/1501)를 채택했다. 북한이 이에 응하지 않자, 이틀 뒤인 6월 27일 안보리를 재소집해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원조’에 관한 유엔안보리 결의안 제83호(S/1511)을 채택하고, 유엔 회원국을 대상으로 국제평화와 안전 회복에 필요한 지원을 권고했다.

S/1551에 근거해 유엔 회원국들이 한국을 돕기 위해 필요한 전투 병력과 물자를 제공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이 제공하는 다양한 전투부대들을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단일 지휘체계가 필수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제안을 받은 유엔은 1950년 7월 7일 ‘국제연합군총사령부 설치’에 관한 유엔안보리 결의안 제84호(S/1588)를 채택하고 안보리 결의 이행 및 한국에서의 유엔군 활동을 지휘하는 국가로 미국을 지명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설립된 국제연맹(LN)과는 달리, 항구적인 국제평화와 안전보장을 도모하고 국가 간의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집단안보’를 기치로 내걸었던 국제연합(UN)이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역사상 최초로 ‘유엔군사령부(United Nations Command)’라는 다국적 통합군사령부를 창설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유엔사는 6·25전쟁을 계기로 유엔이 안보리 결의를 통해 창설한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국제연합군이다.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

유엔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45년 10월 24일 연합국들이 중심이 되어 국제 협력을 증진하고 세계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국제기구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국가 간 연합체이자 가장 많은 국가가 모이는 다자 회의 기구다. 국가와 민족을 아우르는 국제기구로서 창립 51개국이던 회원국은 오늘날 전 세계 대부분인 193개국으로 늘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이 설립했던 국제연맹이 제2차 세계대전을 막지 못한 실패를 교훈 삼아 보다 적극적인 평화 보장과 안정적인 국제질서 유지를 위해 군사력 동원까지 가능한 ‘집단안보’를 지향했다. 뉴욕시 맨해튼에 있는 유엔본부 지역은 특정 국적이 없는 ‘세계인의 땅’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본부 이외의 주 사무소는 제네바·나이로비·빈에 있다. 유엔의 운영 자금은 회원국들의 자발적 기부금으로 운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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