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남정욱

극장에 걸린 좌파 세계관의 영화가 인기를 끌 때 우파의 반응에는 패턴이 있다. 먼저 탄식이다. "아이고 또 나왔네, 또 나왔어." 관람객 수가 늘어나면 탄식은 분노로 바뀐다. "XX, 이러다가 천만 가겠네."

다음은 질타다. 영상을 통한 역사 왜곡이라며 난리를 친다. 이때 걸고넘어지는 게 영화 오프닝 타이틀에 깔리는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라는 문구다. 실화를 기반으로 했다면서 왜 이렇게 실제와 다르게 영화를 만들었냐는 비판인데, 나는 바보올시다 자복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외국 영화에도 흔히 등장하는 ‘This story is based on true event’를 그대로 옮긴 이 문구는 그러나 실제 있었던 일을 재현했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스토리(story)라는 말 자체가 허구의 이야기를 의미하며, 트루 이벤트(true event)란 영화 속 이야기가 실제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소재로 삼은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란 뜻이다. 소재가 팩트(fact)의 전부인 것이다. 예를 들자면 영화 ‘덕혜옹주’에서 팩트라고는 그런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민망할 정도로 사기다.

좌파들이 이 문구를 애호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관객에게 마치 팩트에 기반을 둔 ‘신뢰할 만한’ 이야기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영화 내용을 두고 논란이 벌어질 경우 감독이 팩션(fact +fiction)이었다며 빠져나갈 수 있는 퇴로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방패를 뚫을 수 있는 무기는 없다. 손님은 끌고 비난은 피해갈 수 있는 보물 같은 문장이 ‘This story is based on true event’, 의역하면 ‘실화 일부 참조, 영화적 전면 창작’인 것이다. 여기다 대고 조목조목 틀린 부분을 짚어가며 왜곡이니 고증 오류니 핏대를 올리는 일이 멍청한 짓인 까닭이기도 하다.

우파가 보이는 세 번째 반응은 우리도 영화를 만들어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자’는 (대부분 말로 끝나는) 의분이다. 아, 겨우 바로잡자라니. 우파의 이 정직함 혹은 고지식함은 문화 전쟁에서 우파가 밀리는 가장 큰 약점이다. 이승만이나 박정희를 다룬 영화 기획이 있다 치자. 시나리오가 나오면 우파는 팩트 체크부터 한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사건들이 허무맹랑한 거짓말은 아닌지 스스로 검열하는 것이다.

그런 순진함은 이제 그만 졸업하자. 이승만을 옹호하는 영화라면 출생, 투옥, 망명 등 공식적인 날짜 기록이 있는 몇몇 사실만 그대로 두고 나머지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재구성해도 아무 상관없다. 한성 감옥을 일시 탈출해 아버지 생신을 챙기고 다시 돌아온다거나 하와이 뒷골목에서 공산분자들과 5대 1로 붙어 모조리 때려눕혀도 전혀 상관없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어로 논쟁을 벌여 루즈벨트가 기꺼이 이승만의 팬이 되는 장면을 넣어도 역시 상관없다. 맥아더에게 인천상륙작전의 아이디어를 주고 시간과 장소를 지도편달해도 ‘영화적으로’ 아무 문제없다.

좌파들 비분강개하며 달려들 것이다. 그럼 "영화는 영화일 뿐" 좌파들의 방어논리로 대꾸하면 그만이다. 꽤 유명한 드라마 작가 한 분은 논란이 된 자신의 역사극을 두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성별만 빼고 다 바꿔도 돼." 영화에서 팩트는 개에게나 주는 것이다. 다 필요없고, 멋있어 보이면 그만이다. ‘실화 기반, 영화적 재구성’이라는 전가의 보도는 특허권도 소유권도 없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휘두르지 못하는 사람이 병자다.

이 대목에서 꼭 이런 말씀 하시는 분 있다. 우파는 ‘품위’가 있어야 한다는 따끔한 훈계다. 그러나 문화전쟁도 전쟁이다. 전쟁은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으로 만들며 목적은 일단 이기고 보는 것이다. 반성은 나중에 (시간이 남으면) 하면 된다. 죽은 다음에는 반성하고 싶어도 못하며 기회는 계속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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