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광
장석광

국정원이 미국의 북한 전문가로부터 자문을 받는 과정에서 요원 3명의 신원이 노출, 정쟁으로 비화되고 있다. 며칠 전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국정원 출신 한 간부가 국회 업무보고 과정에서 안경과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 논쟁이 된 적도 있었다. 이래저래 어리버리한 스파이의 신원 노출이 논란의 핵심이다.

스파이는 신원이 노출되면 현재 진행 중인 공작은 물론 미래의 공작까지 타격을 입는다. 제일 먼저 스파이와 스파이 가족들이 위험해진다. 다음으로 스파이를 둘러싼 각종 정보자산, 스파이의 동료, 정보원들의 안전이 위험해진다. 정보공동체의 신뢰는 깨지고 정보기관의 공작역량은 약화된다. 정치적으로 민감하거나 불법적인 스파이 활동은 국제적 긴장을 유발한다. 스파이 신원 노출의 최종 귀결점은 당연히 국가안보의 위협이다.

그러나 스파이의 신원이 의도적으로 공개되는 경우도 없진 않다. 스파이의 과거 활동이 비밀 등급에서 해제된 때, 공개의 실익이 공개의 위험보다 더 클 때, 시간의 경과로 스파이의 신원이 더 이상 민감하지 않을 때 등이다. 이때 스파이는 회고록을 쓸 수도 있고, 영화나 책 또는 미디어에 관여할 수 있다.

전직 외교관 윌슨(Joseph Wilson)이 2003년 7월 6일 뉴욕 타임스에 ‘내가 아프리카에서 찾지 못한 것’(What I Didn’t Found in Africa)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이라크의 핵무기 프로그램과 관련된 일부 정보가 이라크의 위협을 과장하기 위해 왜곡됐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대의명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평론이었다.

8일 뒤인 2003년 7월 14일, 칼럼니스트 로버트 노박(Robert Novak)이 워싱턴 포스트를 통해 윌슨을 반박했다. 친 부시 성향이었던 노박은 윌슨의 평판을 떨어뜨리기 위해 윌슨의 부인인 밸러리 플래임(Valerie Plame Wilson)이 CIA 비밀요원이라는 사실을 공개했다. "행정부 고위 관료 2명에게서 들었다"고 출처까지 밝혔다.

플래임의 신원이 노출되자 그가 근무하던 중동의 컨설팅 업체 ‘브루스터-제닝스 앤드 어소시에이트’가 CIA의 위장 회사였음이 밝혀졌다. 직원으로 위장했던 CIA 요원들의 신원도 모두 노출됐다. 플래임과 접촉했던 사람들은 자신이 그동안 CIA와 거래해왔음을 알아챘다. 플래임의 정보망들은 모두 잠적했다. 플래임이 그동안 구축해 놓은 휴민트와 네트워크는 한순간에 붕괴됐다. 플래임이 관여한 대량살상무기, 핵무기 확산 방지와 관련된 모든 공작 활동이 일거에 취소됐다. 플래임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파이가 됐지만, 더 이상 스파이 세계에 머물 순 없었다. 플래임은 CIA를 떠난 후 협박을 피해 주거지를 옮겨 다녀야 했다.

초(超)연결사회에서, 소셜미디어·이메일·광범위한 데이터 베이스 시스템·브라우징 히스토리(방문 기록) 등 온라인 활동은 디지털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없다. 안면인식 기술을 기반으로 한 CCTV, 빅데이터 분석, 디지털포렌식 기술의 발전은 디지털 삶에서 위장 신분을 만들어 내기 점점 더 어렵게 하고 있다. 34년간 동독 해외정보국(HVA) 국장으로 활동하면서 동독의 어떤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사진 한 장 발견되지 않았던 마르쿠스 볼프(Markus Wolf)도 디지털 사회에선 흔적을 남기지 않고 활동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더운 날씨다. 뜬금없이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주연배우 김수현 얼굴이 떠오른다. 논란이 된 국정원 요원들의 얼굴이 한 명 한 명 김수현 얼굴에 겹쳐진다. 청량한 기운이 느껴지면서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지어진다. ‘어리한 게 당수 8단’ 디지털 사회의 맞춤형 스파이! 바로 ‘어당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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